본문 바로가기

개인의 취향 /Music

전경옥, 민들레처럼


지난주에 인사동 골목길 어딘가를 헤매다가 들어간 허름한 찻집에서 들어갔었다. 콧등을 시리게 하는 추위는 따뜻한 곳을 본능적으로 찾게 한다. 온기를 쫓아 서둘러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고 들어가려는 찰나, 콧구멍의 숨을 따라 들어온 청국장 냄새. 무슨 찻집에서 이런 냄새가 날까, 희안한 곳이네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냄새나는 찻집의 정체가 파악됐다. 파전에 막걸이 한잔 걸치는 70-80년대의 종로를 연상케 하는 뭐 그런 곳이었다. 얼큰하게 달아오른 취기로 정치가, 경제가 어떠니 하며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아주 소심하게나마 풀어보려는 그런 곳.

찻집이 아니었어도 상관없었다. 이미 식사는 마치고 난 뒤라 배는 든든했고, 청국장 냄새는 났지만 시골스러운 푸근함과 따뜻한 방바닥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도인처럼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주인은 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우리를 향해 웃기지도 않은 핀잔을 준다. '고기 먹구 왔구나!' 이러면서. 그래, 고기 냄새가 꽤 났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청국장 냄새는 얼마나 고상해서, 여기도 냄새나는 음식점이면서 식사 하고 온 우리에게 저런 소리를 하는가. 황당했다.

근데 더 가관이었던 것은 시키지도 않은 모과차를 자기 마음대로 적어놓으면서 내 속을 뒤집은 것. 게다가 차는 꼴랑 유자, 모과 밖에 안된다는 퉁명스러운 태도는 기어코 한마디 쏴줘야겠다는 충동을 목구멍까지 차오르게 했다. 아마 “승훈씨 생각보다 뒤끝있네”라는 일행의 만류가 없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행색을 보아하니 수염도 범상치 않았지만, 입고 있는 복장도 특이했다. 통이 넓은 개량한복바지에 목이 시원하게 늘어한 후리한 티셔츠, 비슷하게 후리한 회색 가디건을 걸쳤다. 대충 보면 도인이나 예술가 같았다. 일행의 말 때문인지 괜한 짜증을 부린건 아닌가 싶어서, 자기 고집대로 살겠거니 싶은 생각으로 이해 해보려 했지만 따뜻한 차 한잔으로 이 포만감을 만족시키려 했던 나에겐 여간 거슬리는 일이 아니었다.

선택권도 없이 시켜버린 모과차와 유자차 한 잔씩과 막걸리 한 사발, 해물전을 주문했다. 아까부터 나던 청국장 냄새나, 주인의 태도와 말투 그리고 느릿한 걸음걸이까지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그래도 해물전은 꽤 잘 부쳐왔다. 크기도 컸고, 두께도 쉽게 부칠만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노릇하게 앞뒤로 적절하게 구워왔다. 사실 나의 불편한 심기는 건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당한 트집 하나 잡아서 아주 합당하게 이 심기를 쏟아내기 위한 스탠바이. 하지만 의외로 잘 나온 파전으로 나의 미각이 흡족해졌고, 덕분에 불편한 마음이 좀 누그러지는 순간, 아까부터 흘러나오던 노래가 좀 더 또렷하게 들렸다.

뭔가 시원하고 맑게 뽑아내는 목청도 목청이었는데, 얼핏 들리는 가사나 멜로디가 좋게는 담백했고, 세속적으로는 꽤나 심심하게 들렸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심심하다는게 더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심심함 덕분이었는지, 모과차와 해물전의 어색한 조합을 담백하게 하나의 분위기로 묶어줬다. 놀라운 콜라보레이션이었다.

꽤나 마음에 들었던 노래의 주인공이 누굴까 알고 싶은 마음에, 영 내키지 않았던 주인이었지만 물어봤다. '바비킴 전에 나왔던 여자 가수는 누구죠?' 마음에 들지 않던 주인은 덮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뭘 그런걸 묻냐는 심드렁한 표정을 잠시 짓더니 전경옥 일 것 같다며 열심히 돌아가던 오디오를 잠시 멈추고 씨디를 꺼낸다. 전경옥 2집 , '사랑앓이'. 들어본 적 없던 이름이었다. 잠깐 잠깐 들렸던 가사를 생각해보니 민중가요 같았지만, 알 길이 없었기에 핸드폰에 전경옥이란 이름 석자를 메모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저런 고민이 많았던 밤, 엊그제 적어놨던 그 이름이 생각났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보니 생각보다 자료가 없었고, 유튜브에서만 몇 개의 노래를 찾을 수 있었다. ‘민들레처럼’. 아쉽게도 2집인 사랑앓이는 아니었지만, 내가 느꼈던 목소리의 매력은 역시나 그대로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음료에 비유해보자면, 차에 가까웠다. 맑은 색상과 은은한 향을 갖고 있고, 무맛에 가까운 심심한 맛은 청량감을 준다. 탄산음료의 자극적이고 인위적인 맛과는 달랐다. 음료수에 억지로 집어넣은 이산화탄소, 그리고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트름으로는 대신할 수 없는 개운함이 있었다.

사실 나는 오로지 차를 좋아하는, 그 정도의 고매함을 갖추진 못했다. 피자나 파스타를 먹을 땐 주저없이 콜라나 사이다를 시키는 사람이니. 하지만 그 본질적인 느끼함을 탄산음료만으로는 대체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오히려 느끼함을 없앤다고 지나치게 많은 탄산음료를 섭취한다면, 음료 자체가 느끼하게 다가온다. 후라이팬의 기름기를 걷어내기 위해선, 뜨끈한 물에 담가내야 하는 것처럼, 담백하게 우려낸 차는 느끼함을 닦아낸다.

자극이라는 단어가 요즘은 그다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진 않는 것 같다. 오만가지 소리가 뒤섞인 세상에서 자기 목소리가 들려지기 위해선, 눈과 귀에 하나 하나 직접 꽂아야하니. 덕분에 우리의 귓속은 피곤하다. 백가지의 소리가 어우러져 멋진 화음을 만들어내기는 커녕 우겨넣은 인위적인 소리들은 각자를 드러낸다. 감상이 강요되고, 피로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이 피로감들을 떠나 도인처럼 고매한 삶을 살기에는, 이 자극에 젖어있는 나나 누군가의 얕은 마음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기에 느끼한 세속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한 감상 정도라면 어울리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이어가다 보니 못마땅했던 수염쟁이 주인이 떠올랐다. 그 주인은 자기 주관이 뚜렷한 고집쟁이가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전경옥의 목소리의 매력을 골라내는 그의 안목은 남아있던 약간의 앙금을 닦아내기에 충분했다. 


 @ 민들레처럼, 전경옥  


'개인의 취향 > Mus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 월간 윤종신, 12월호 "나이"  (0) 2011.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