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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Note

해방촌 이야기 #1


강남 태생은 아니지만, 지난 20여년 간을 강남에서 자라왔던 나에게 '강북'은 몇 가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 추억들은 90년대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알만한 '지역색'에 관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학창시절 '강남'과 '강북'으로 비교되는 패션은 사춘기의 우리들에겐 가장 큰 화두였다. 온 바닥을 쓸고 다니며 '통큰' 바지로 대표됐던 힙합 스타일의 패션이 강남을 점령 할 무렵, 강북에서는 오히려 현재의 모습과도 유사한 '스키니' 패션이 대세였다. 옷가지의 형태에서도 극과 극으로 상반되는 이 두 지역의 패션 대립에서 우월감을 갖고 있던 지역은 단연 강남이었다. 당시 TV에서 주로 접하던 연예인들의 패션이 대부분 강남의 압구정을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미 강남은 70년대 집중 개발 이후부터 '부촌'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았던가.

재밌자고 했던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론 오랫동안 살아왔던 이 동네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한때는 가장 트렌디했던 압구정동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번지르르한 성공의 대명사 이외에는 별 특별한 이야기 없는 동네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갖 상가들로 밀집된 동대문 일대, 또는 옥수동이나 이화동의 길 거리를 걸을 때면 화려하던 강남에서 느낄 수 없던 사람 냄새들이 느껴졌다. 물론 그 냄새들이 실제로 살가운 관계들로 이어지는 감히 판단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외모나 패션으로 상대를 스캔하며 우월감을 저울질하는 강남의 그것들보다는 따뜻해보였다. 

사실 역사에서 살펴보자면, 우월감을 드러내야 할 쪽은 강북이다. 지금은 화려한 모습으로 차려입고 거만하게 서있는 강남이지만, 개발 이전의 모습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잠원과 잠실이라는 지명처럼 누에를 치고, 논과 밭만 있던 곳이 강남이었다. 이렇게 논밭에 불과했던 강남에 비한다면 강북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도읍이 이전 된 이후, 조선왕조 500여년의 역사와 근 현대사에서 가장 중심에 있었던 지역이었다. 얼마전에 소실 된 남대문이나 동대문의 본래 의미를 생각한다면 중심지라는 이야기가 쉽게 와닿을 것 같다. 도성의 경계를 구분짓고 내외부의 출입을 담당하던 4대문으로, 강북의 주요 지역들이 도성 안에 위치한 것이다. 실제로 강남의 대부분이 서울로 행정구역이 정해진 것은 1963년 이후이니, 강북에 누적된 역사의 무게감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나 역시 강남에서 살아오며 싫든 좋든 강남의 분위기와 가치관들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현재의 강남에 비해 강북이 낫다는 거나, 강남이 잘못 됐으니 지금 강북이 대안이 돼야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향수 어린 강북의 이모저모를 걸으면서 느껴지는 감흥이나 감상들을 이야기하고, 혹여나 버릴 수 없었던 강남인의 잔재가 강북의 이야기들을 경시했던 것은 없었는가 곱씹어보려고 한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곳은 해방촌이다. 타 지역에 비해 긴 역사를 갖고 있진 않지만,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6.25 전쟁이 맞물린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지역 중 한 곳이다.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첫 째는 이름 그대로 해방촌은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생겨났던 마을이라는 점이다. 주로 이북지역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임시거처로 남산기슭을 사용하면서부터 생겨난 마을이란 것이다. 즉,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남북분단의 과정에서 생겨난 해방촌은, 분단이라는 민족적 상처의 단면을 보여주는 곳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산업화과정 속에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던 이주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무일푼의 월남인과 이주민들로 구성된 해방촌의 풍경은 빽빽한 판잣집들로 대표되었다.  
 


해방촌은 지하철을 이용해 갈 수 있다. 5호선 녹사평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오면 해방촌으로 갈 수 있다. 현재 해방촌의 정식 행정구역명은 '용산동2가'이다. 참고적으로 녹사평 역은 생김새가 굉장히 독특하다. 긴 원통형 구조로 되어있는 약간은 복잡하거나 특이한 형태로, 그 독특한 디자인 때문에 결혼식이나 웨딩촬영이 열리는 이색 지하철역이라고 한다. 


2번 출구로 나오면 왼쪽에 높은 담장이 보인다. 이 옆은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다. 보이는 길을 따라 주욱 걸어가면 해방촌으로 들어가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해방촌까지 가는 방법은 이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 방법과, 건너편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해방촌 오거리까지 가는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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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살펴보면 해방 후 47년에는 해방촌 지역은 용산동회에서 관할하였기 때문에 '용산동회'로 불리웠다.  하지만 해방촌의 규모와 입지가 커지면서 '해방동회'가 신설되었고, 이후 해방동과 신흥동으로 구분되어 지게 된다. 그리고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었지만 신흥동으로 나눠지기 전에 동부동과 서부동으로 나뉘어 불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동의 규모가 나눠질만큼 크게 성장했던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 다시 해방동과 신흥동은 용산동2가 1동과 2동으로 바뀌었다가, 1977년 현재의 용산동2가로 통폐합 되게 된다. 



미군부대 담벼락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대로 옆으로 길이 하나 더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해방촌 오거리로 이어진다. 남산자락이라는 위치답게 어지간한 위치에선 남산타워가 이정표처럼 우뚝 솟아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해방촌 오거리까지 도보로는 15~20분정도 걸린다. 추위와 체력이 걱정된다면 마을버스를 타고 가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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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오거리까지 가는 길에는, 주변의 미군부대의 영향으로 세련된 까페나 햄버거 가게 등을 비롯해 외국인 마트, Mosque 같은 종교 모임 장소까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중간 중간 예쁘게 생긴 까페들이 들어서서 한 번쯤 눈길을 줄만하다. 추위를 달래고자 잠깐 들어갔던 커피숍에서는 온갖 벽에 붙은 영어 모임 홍보 문구와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외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후 50여년의 그 세월의 흔적은 지금도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해방촌이라는 글자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괜한 걱정의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오거리로 가는 길에 만난 우체통은 '해방촌'이 용산구에 속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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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오거리까지의 길은 다소 가파른 언덕의 연속이다. 쉬엄쉬엄 가지 않고 꾸준한 속도로 걸어간다면 숨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걷는 동안 주로 눈에 보이는 풍경은 2-3층의 빼곡히 들어선 주택가이지만, 그 사이로 정겨운 장면들이 목격되기도 한다. 그 중 눈을 사로잡은 것은 청계천 어드메에서나 볼법한 기원이었다. 올라오는 길을 더듬어 봐도 특별한 편의시설이나, 오락시설이 없었던 만큼 '편안한 휴식공간'이라는 글자처럼 오랜 시간동안 동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 해방촌 오거리의 모습


해방촌 5거리에 도착하면 올라오는 길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보여진다. 다섯갈래의 길들이 만나는 만큼 정류장 주변으로 경찰서와 편의점, 시장통이 눈에 띄인다. 만약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이동했다면, 해방촌의 중심지에 도착했다고 봐도 된다. 사진에서 보이는 정면으로는 해방촌 교회와 신흥시장, 보성여고가 이어지고 오른쪽 길은 후암동으로 내려가는 길과 이어진다. 경찰서 위쪽으로 나있는 사잇길로 올라가면 해방촌을 발 아래에 두고 후암동과 서울의 전경을 감상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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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해방촌의 주요 구성원은 이북 사람들이었고, 더 지역을 작게 보자면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었다고 한다. 본토 아비 친척을 떠나 쫓겨나듯 피난했던 월남인들에게 남은 것은 동향에 대한 애착과 유대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방촌의 월남인들 사이에서의 결속은 유별났고, 초기 특정 지역에선 선천지역 사람들이 아니면 입주가 불가능한 곳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선천군민회가 조직되고, 반공활동과 같은 정치적 지연적 공동체를 이루며 해방촌의 공동체성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지연공동체는 산업화과정에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이주민들로 인해서 정체성이 희석됐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과 더불어 경제적인 부를 축척하게 된 대다수의 월남인들이 스스로 해방촌을 떠나면서 가속화 됐다고 한다. 월남인들에게 해방촌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자 제 2의 고향처럼 여겨졌지만, 가난과 배고픔의 어려웠던 시절의 해방촌은 잊어야만 하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 배고프고 가난헀던 해방촌을 어루만졌던 해방교회


지연공동체와 더불어 해방촌의 구심점이 됐던 것은 종교였다. 사진에 보이는 해방교회는 해방촌 내 많은 교회들의 모태가 됐다. 초기 북한에서 내려온 기독교신자들은 남대문교회와 을지로에 있던 베다니교회(이후의 영락교회가 된다)에 다녔고, 대부분 평안북도에서 온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촌에서 몇 몇 사람들이 모여서 '해방촌교회'를 시작했고, 이 후 남대문교회에서 교역자를 파견함으로써, 정식교회로 출발하게 됐다. 

전쟁 직후 해방촌, 즉 월남인에 대한 일상적인 도시계획정비 차원의 정책이외에 서울시나, 정부의 특별한 정책은 없었다. 일부 단체나 개인들에게 제한적인 지원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해방촌 주민들을 위한 실제적인 지원이라고 하기엔 힘들었다. 정치적인 이유가 다분했었기 때문에 유난히도 서글픈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해방촌이었다. 이렇게 소외됐던 해방촌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우며 삶으로 밀착해 들어갔던 곳이 해방교회였다. 월남인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창구로서, 해방교회는 교육과 사회복지를 통해 해방촌을 어루만졌고, 단순한 종교시설을 이상의 의미로 남게 된다.

빽빽한 주택가들이 들어선 해방촌에서 아마 가장 큰 건물이 아닐까 싶다. 예배당이 닫혀있어서 들어가진 못했지만, 가난과 배고픔의 속에서 유일한 안식과 위로였을 교회를 떠올리니 새삼 경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옆으로는 해방 어린이집이 있었고, 엄마와 함께 어린이집을 나서는 아이의 뒤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 "하나님을 경회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보성인.."


 해방교회를 지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성여자고등학교를 만날 수 있다. 방학기간이라 교문이 닫혀있었는데, 벽에 적혀있는 글귀가 눈에 띄였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보성인..'. 십계명에도 나와있는 이 구절은, 학교목표에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해서 나라와 겨레에 헌신 봉사하는 참된 한국 여성을 육성한다". 신앙인은 자신의 구도에만 머물러있지 않는다. 빛과 소금으로, 증인으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세상을 향한 역할이 신앙인들에게 부여된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교육 목표는 시대상의 단편을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재 100여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학교들의 상당수가 북한지역에서 시작됐고, 숭의여학교,숭실대학교, 오산하교 등이 남한에서 재설립 됐다. 그 중 보성여중, 고등학교를 비롯한 숭실 중,고등학교가 해방촌을 근거로 다시 세워졌다. 미국 선교사에 의해 평양의 사랑방 학교로 시작된 숭실 중,고등학교는 1938년 평양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3숭'이라 불리던 숭의, 숭전과 함께 일제에 의해 폐교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 한국 전쟁 중 피난학교를 열게 됐고, 전쟁후에는 해방촌에서 미군의 도움으로 가건물을 지어 교육을 실시하다, 1956년에 정식 건물을 완공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숭실학교의 위치였는데, 과거 일본신사가 자리잡고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고 한다. 일제강점시기이래 해방까지 남산은 숲으로 둘러싸인 산림지역이었다고 한다. 1925년에 건립된 조선신궁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신사들만 자리하고 있었던 남산의 자리에, 해방 이후 일제에 의해 폐교됐던 숭실학교가 일본 신사가 있던 그 자리였다. 당시 조선신궁을 비롯한 각종 신사의 역할은 '민족말살정책'의 맥락에서 남산이라는 서울 중심지에서 조선을 내려다보며 정신 세계를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평양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를 당해야 했던 3숭이 모두 일제의 신사를 깔아뭉겠다는 의미는, 제국주의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었다. 이후 숭실중고교는 마포구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보성여자 중,고등학교는 숭실학교와 마찬가지로 미국 선교사에 의해 평북 선천에 설립된 보성여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숭실학교와 마찬가지로 부산 피난학교 시절을 거쳐, 1955년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 현재의 남산타워는 2005년에 새롭게 리모델링 됐다


날씨만 흐리지 않다면 제주 전역에서 그 중심에 있는 한라산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한라산처럼 해방촌을 올라오는 내내 남산타워 역시 고개를 들기만 하면 볼 수 있다. 언덕길을 오를 때만해도 멀리있어 보였지만, 해방촌에서 바라본 남산타워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남산타워는 자물쇠로 유명한 연인들의 주요 데이트 코스이자, 인바운드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코스 이기도 하다. 서울 전역을 파노라마로 감상 할 수 있고, 시야가 맑다면 송악산이나 인천항까지 볼 수 있기에 그 경관을 보기위해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해발 479미터의 남산타워 만큼은 아니지만, 해방촌 역시 높은 곳에 위치한 만큼 서울의 풍경을 감상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 해방촌 주차장


판잣집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의 풍경은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이지만, 해방촌이라는 지명은 아직도 곳곳의 상호에 남아있다. 해방교회를 지나 한켠에 자리잡은 주차장의 이름 역시 '해방촌'이었다. 

@ 작업을 마치고 남은 천조가리들이 가게 밖으로 수북하게 쌓여있다


해방촌의 경제를 담당했던 것은 초기에는 '사제연초제조업'이었다. 쉽게 얘기하면, '담배'이다. 복잡한 기술이나, 도구들이 필요치 않았고 자녀들의 인력만으로도 가내 수공업이 가능했기 때문에, 남대문 시장등으로 내다 팔기에 적합한 주요 '상품'이었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이 작업에 종사하면서 5.16 쿠테타 전까지 해방촌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쿠테타 이후 당국의 통제로 '편물업'(털 스웨터 짜기)으로 전업이 이뤄졌고, 한 때는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과 유명 백화점까지 의류를 납품을 하면서 성황이기도 했다. 이러한 편물업은 온통 판잣집 뿐이었던 해방촌을 현재의 기와집이나 양옥집으로 만든 주역이었다. 현재도 해방촌의 주요 경제 소득원은 편물업이지만, 의류계의 급속한 발전으로 쇠퇴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 해방촌 고양이


보성여고를 둘러보다 어디선가 들린 '갸르릉' 소리.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에겐 친숙했던 이 소리를 찾기위해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이리 저리 찾다가 눈 앞의 담 너머로 까치발을 들어 살펴보니, 끄트머리가 보일만한 지붕과 지붕 사이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갸르릉 거리고 있었다. 탐방을 갔던 날은 해가 높이 뜨던 정오부터 해가 지기전까지 제법 날씨가 훈훈했던 때였다. 아마 볕이라도 쬐려고 할 참이었는데, 저벅저벅 골목길을 걸어오던 소리가 꽤나 거슬리게 했는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의 카메라와 대치하고 있었다. 

한 시대의 단면을 안고 있는 해방촌은 종종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곤 했다. 1975년에 소설가 강신재는 <해방촌 가는길>을 발표했고, 초기 한국 영화의 명작으로 남을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의 무대가 해방촌이었다.  최근 작품에는 황인숙 작가의 수필집 <해방촌 고양이>가 있다. 나도 고양이를 굉장히 좋아하는-고양이 한 마리 키워본 적 없는- 애묘인이지만, 해방촌의 골목길을 떠돌며 5년간 30여마리의 길고양이들의 사료를 챙겨준 황인숙 작가는 여간내기가 아닌듯 하다. 해방촌이라는 배경 때문인지, 골목길을 숨어다니는 고양이들을 돌보는 손길이, 실향의 외로움과 가난과 배고픔의 서러움을 달랬던 그 누군가의 손길과 닮아보인다. 

"은빛 천막 위에서 몸을 쭉 뻗고 일광욕을 즐기던 고양이가 예감이 이상한 듯 고개를 들어 둘러보다  나를 향해 얼굴을 멈춘다.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황인숙 '지붕 위에서 中..'


<그작가 그공간, 황인숙의 해방촌 골목 /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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