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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Note

해방촌 이야기 #2


36년에 걸친 식민시대의 종결로 맞이했던 지난 1945년의 8월은 기쁨의 열기로 뜨거웠다. 억압과 핍박, 수탈 등은 물론이고, '민족말살'을 목표로 자행된 온갖 만행들로부터의 해방이기에 새로운 희망에 대한 기대감 역시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일본의 점령을 무장해제 하기 위해 들어온 소련과 미국은 각각의 이념으로 남과 북에 영향을 끼쳤고, 그 이념의 씨앗들은 국민들에게 분열과 혼란의 싹을 틔워나갔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는 48년도 10월에 일어난  여수-순천 일대의 반란사건은 극심한 이념대립의 충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여수에 주둔하는 14연대는 제주도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좌익세력이었던 상사의 선동으로 진압작전을 거부하고 여수-순천 일대를 장악했다. 그리고 이들은 지역의 지서와 관공서를 습격하며 우익분자와 유지, 지주세력들을 살해하면서 좌익의 이념을 피와 함께 물들여 갔다. 이들 반란세력은 한 때는 정부 토벌군과 맞서 싸우며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이후 계속되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지리산, 백운산 일대에서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소위 말하는 빨치산(Paritisan)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 사건으로 관민 1200여명, 반란군 800여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고, 6.25 전쟁과 함께 이념 대립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혼란과 대립이 고조되면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그 갈등은 정점을 찍게 된다.  이 전쟁은 3년동안 계속 되면서 전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해방의 기쁨과 희망을 꿈꾸기도 전에, 그 기반이 될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200만명 이상의 사망자, 20만명의 전쟁 미망인, 10만명이 넘는 전쟁 고아, 1000만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남한의 45% 북한의 80%의 산업·교통시설, 정부건물의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사회·경제적 기능이 마비되었다.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었던가.

하지만 모든 것을 앗아간 전쟁이 사람을 통해서 일어난 것처럼, 그것을 회복하는 일 역시 사람에 의해서 시작됐다. 우리민족의 유별난 근면·성실한 태도는 맨땅을 다시 일궈냈고, 세계에서 그 유례가 드문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해방촌 역시 그 시간을 함께 맞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해방촌은 그 재건의 과정이 오롯이 담긴 간난신고의 역사 자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투쟁이었을 해방촌 사람들이었지만, 끝내는 이 고통의 굴레를 끊어내고자 하는 의지는 잃지 않았다. 이러한 의지의 염원을 담은 것이, 해방촌 곳곳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바로 '신흥 (新興)'이라는 두 글자였다. 전편에서도 설명했듯이 '해방촌'이란 지명이 이 지역에 담겨있기도 했지만, 신흥길·신흥상회·신흥여관 등의 이름 역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지금 소개할 신흥시장은 더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시장의 기본적인 역할은 물물의 교환이지만, 온갖 정보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정보라고 할만한 것이 그다지 있었을 것 같진 않고, 아마도 오늘, 내일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이었을 것이다. 콩나물 하나에 인심 좀 더 쓰라며 목청을 높여 실갱이를 벌이는 아낙들부터, 허구헌날 싸우기만 하는 언덕배기 김씨네 흉을 보거나, 딸만 넷을 나면서 그렇게 구박받던 구씨네 며느리가 끝내는 아들을 보게 됐다는 소식과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진 시어미의 이야기까지, 매일 같이 신흥시장에서는 해방촌의 희노애락이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신흥시장에 대한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그 이름처럼 흥과 활이 아닌 쇠와 퇴였다. 이름 때문인지, 약간은 아이러니함이 느껴지졌지만,  현재의 신흥시장의 모습이 꼭 이해되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재래시장의 쇠퇴가 오늘, 내일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신흥시장에서 느껴졌던 것은 꺼져가는 생명력이었다. 성공을 향해 고군분투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해방촌을 떠남으로써 해피 엔딩을 맞았지만, 신흥시장은 그들과 함께 떠날 수 없었다. 이제는 텅 빈 무대의 쓸쓸함을 안고 몇 개의 점포만이 남아 그 생명력을 근근히 이어가고 있었지만, 이제 곧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예감은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 신흥시장의 '흥'이 떨어져 있다. 흥이 아닌 쇠퇴에 접어든 시장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신흥시장으로 가는 입구는 두 군데가 있다. 그 중 하나는 해방촌 오거리에서 해방교회와 보성여고로 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다. 정확하게는 해방교회 앞쪽에 위치해 있다.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중간에 작게 입구가 나 있어서 머리 위의 간판을 확인하지 못한다면, 좁고 어두운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이 신흥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을 쉽게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 썰렁한 시장통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수조에는 꽤 많은 물고기들이 있었다


떨어진 간판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면 오른쪽으로 시장 안쪽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길이 이어진다. 초입에는 신흥시장의 화장실이 가장 먼저 보인다. 낡고 어두운 분위기를 봤을 때, 작고 옛스러운 스타일의 화장실이 있어야 할텐데, 벽돌로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는 신식 화장실이 있는 모습이 사뭇 의아하다. 별나보일 정도로 신경쓴 화장실의 모습이 어떻게든지 시장의 활기를 불어넣으려 했던 누군가의 노력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화장실을 슬쩍 지나 보이는 횟집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신흥시장의 모습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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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방문했을 때가 늦은 오후이긴 했지만, 확실히 대낮임을 알 수 있을만큼의 밝은 시간대였다. 하지만 신흥시장은 온통 슬레이트 지붕으로 뒤덮여 있어 어둑했다. 시계를 보지 않는다면 그 시간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몇 개의 가로등 같은 것이 설치 돼 있었지만 그리 신통치 않았는지, 가게들 각자의 전구로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두운 시장통을 밝힐만한 여력은 없었고, 고작 자신의 발 밑 정도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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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집을 제외하고 시장통의 중심부에서 장사를 하는 집은 한 곳이었다. 문을 닫은 가게가 대부분인 시장통은 안팎으로 박스들이 널부러져있거나, 비닐봉지 같은 것들로 부산스러워보였다.  하지만 덩그러니 홀로 남아있는 가게는 가지런히 놓여진 플라스틱 병에는 각종 기름들이 담겨 있었다, 기름병 주변으론 그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하얗게 갈린 곡물가루도 흐트러짐 없이 차곡히 쌓여 정돈 된 모습이었다. 가게 벽에 붙어있는 '농수산물 판매 시범점포'라는 푯말이 한 때는 이 가게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고, 썰렁해진 시장통을 끝까지 지키게 한 자존심이었을지 모른다. 

@ 각종 물품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농수산품 판매 시범 점포'를 지나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육점을 만날 수 있다. 고급 수입육부터 닭고기까지 각종 고기들을 취급하고 있다. 짧은 생각으로는 아마도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지면서부터 이 정육점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싶다. 어려웠던 그 시절, 고기는 커녕 어떻게 하면 한끼라도 해결할 수 있을지, 끼니에 대한 걱정과 그 배고픔이 일상이었을테니 말이다. 정육점의 붉은등이 잠깐이지만 약간의 생기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흰 섀시의 출입문이 단단하게 닫혀있는 모습은 코트깃을 여미듯 움츠려든 시장의 분위기와 닮아있었다.

@ 충남 정육점


정육점 사진을 찍고 있는데, '쉬이익' 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정육점 건너편에 있는 가게에서 나던 소리였다. 살펴보니 아무런 표시가 없었기에 무엇을 파는지 혹은 팔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창문에 붙어있는 반투명 시트지 사이로 새어나오는 불빛과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그림자가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적막한 시장의 분위기를 더했다. 아까부터 소리를 내며 뿜어지는 정체모를 흰 증기만이 시장통의 차가운 공기를 잠시 데울뿐이었다. 

@ 닫힌 문 앞으로 덩그러니 놓여있던 평상


그 옆 가게의 창문에는 청색 테잎으로 'X'가 쳐져 있었다. 급전을 빌려준다는 일수꾼들의 명함과 전단지 몇 장이 바닥에 굴러다닐 뿐 가게 안은 텅 비어있었다. 창문의 'X'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였을까. 텅 빈 가게를 둘러보니 알루미늄 섀시로 사방이 꾸며져있다. 아마도 좌판을 꺼내놓고 옹기종기 모여있던 자리에 섀시를 올리면서 공간을 따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모서리를 맞댄 2면이 큰 유리창으로 돼 있다. 가게 정면도 그렇지만 사잇길로 오가는 이들의 눈길도 끌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 창으로는 휑하니 비어버린 바닥만이 보일 뿐이다. 

@ 텅 비어버린 가게


대게 재래시장들은 가운데에 길을 두고 양 옆으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의 형태였다. 손님들은 길을 오가며 좌판에 진열 된 상품을 보고 주인을 불러 물건을 사갔다. 반면에 신흥시장은 가게들이 'ㅁ' 로 모여있는 형태였다. 그리고 지붕이 얹혀지고 앞·뒤로 출입구가 생기면서 신흥시장만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실내였을지 아니면 실외였을지 그 구분이 애매하지만, 적어도 이 시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공기와 냄새를 구분하기엔 충분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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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모든 가게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면 신흥시장을 돌아보는 시간은 꽤 길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텅빈 시장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가게는 손에 꼽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로 이것저것을 담아보며 시간을 보내보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마지막 모서리를 지나고 있었다. 
  

@ 후암동으로 이어지는 길에 나있는 신흥시장으로 통하는 또다른 문


모서리의 끝에는 또 다른 출입구가 있었고, 빛을 따라 어둑했던 시장통에서 나오니 눈이 부셨다. 간판의 글자가 떨어지고, 아래 달려있는 식당 간판이 더 눈에 띄던 들어왔던 입구보다 크기가 크고, 후암동으로 이어지는 길쪽으로 나 있었다. 위치와 크기로 봤을 땐 정문처럼 생각된다. 입구에 있는 횟집은 안에서 봤던 가게들과 다르지 않았다. 빈 수조에 가림판까지 가려져 있는 모양이, 가게 문을 닫은지가 오래 된것 같았다. 

신흥시장을 둘러보면서 가끔씩 들렀던 삼선교의 시장통이 생각났다.
(http://www.cyworld.com/doyou4/296552, 고은지님의 블로그, 재개발 전의 삼선시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삼선교 시장은 전형적인 골목형 재래시장이었다. 색색의 천막천 위로 햇빛이 비치면, 중앙의 길을 따라 늘어선 야채와 과일들 위로 붉고 푸른 빛이 쏟아졌다. 그 한켠에는 고무 양동이에 나물들이 한가득 쌓여있고, 마분지에는 삐뚤빼뚤 한 글씨로 그 이름들이 적혀있다. 새빨간 고춧가루가 잘 버무러진 김치와 파랗고 노란 각종 반찬들이 그득하게 유리 진열장을 채운 반찬가게들은 저녁반찬을 걱정하는 엄마들의 시름을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였을지 모른다. 시장의 중간즈음에는 찾아오는 이들의 허기를 달래기 위한 주전부리 가게가 있어, 노릇한 파전과 튀김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통을 시원하게 비우시는 어르신들의 일상이 흘러갔다. 

차가운 얼음을 깔고 드러누워 그 눈깔을 희번뜩이던 생선들이 늘어진 생선좌판을 지날 때면, 투박한 나무 도마 위에 살벌하게 꽂혀있던 칼날이 있었다. 빨간 고무장갑과 바구니 그리고 등이 푸른고 반짝이는 그네들의 대비가 노란 백열전구의 빛과 만났을 때는, 손에 있던 카메라를 빼어들지 않을 수 없는 명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눈이 바쁘고, 손에 들었던 카메라가 바빴다. 물론 내 욕심 차리고자 드리미는 카메라가 반가울리 없는 상인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그러다 카메라가 없을 때면 눈에라도 담아넣기 위해 몇 번이나 왔던 길을 거꾸로 걷기도 했다. 

삼선교 시장 역시 환경개선과 정비를 목적으로 다른 재래시장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삼선교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 돼 있던 상권 덕분에, 어깨를 맞대고 있던 오밀조밀한 모습은 없어졌지만 현재도 시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 역시 그랬지만, 소위 옛 추억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며 재래시장을 찾는 이들이 있다.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으며 푸근한 추억을 느끼려는 이들의 감상적인 가치 말이다. 하지만 실 재래시장의 가치는 좀 더 실재적인 것에 있다. 주거지역에서 가까운 높은 접근성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기여 할 수 있고, 저렴한 가격과 소량구매가 가능한 환경은 서민들의 물가부담에 대한 고충을 해결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형마트의 편의성과 서비스에 비하면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고, 최근에는 SSM을 통한 대형마트들의 지역경제를 잠식하기 위한 행보들이 가뜩이나 위태롭던 재래시장의 숨통을 더욱 조여오고 있다.

사실 신흥시장을 비롯한 해방촌의 운명은 후암동부터 해방촌을 포함한 용산공원(현 미군부대 위치, 용산공원 건립 예정)까지를 잇는 '남산 그린웨이' 프로젝트로 그 역사가 마무리 될뻔 했다. 현재 해방촌(용산동2가) 거주자들을 후암동으로 이주시키고, 해방촌의 구릉을 녹지대로 만들려는 것이 주요 계획이었지만, 해방촌 사람들의 반대와 오시장의 퇴임으로 성사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해방촌의 현재는 계속 될 것 같다. 

@ 신흥시장


그러나 50여년동안 해방촌의 웃음부터 눈물까지, 그 이야기들을 깨알같이 담아냈던 신흥시장의 미래는 이 일과 상관없이 끝이 보이는 것 같다. 천수를 누렸다던 옛 사람들도 결국 정해진 시간을 누렸을 뿐이다. 신흥시장도 누군가 정해놓은 생명의 끝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린웨이 프로젝트로 인해서 강제적인 철거가 이뤄지거나, 근처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상권이 위협 당하는 일과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아직도 밖은 환했지만, 생명력이 다해가던 신흥시장의 쓸쓸한 모습을 둘러본 마음이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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